초록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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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리뷰 언론기고] 대중교통과 성장 중독, 자전거(9월 4주차)

  대중교통과 성장 중독, 자전거.   자본주의가 전 지구를 하나의 전체로 지배하고 있다. 그야말로 전일적 지배를 이루었다. 공간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교육, 의료 등 공공부문까지, 심지어 대중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예술까지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지구를 전일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은 모든 부분이 판단과 행동의 기준을 효율성과 성과, 이윤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단기적 성과로만 판단하다. 이런 자본주의가 한국사회에 들어온 지 길게 보면 100여년에 불관한데, 그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성과를 이뤄냈다. 그것도 최근 30-40년 사이에. 눈 앞에 보이는 성과를 놓고 문제제기 하는 것이 쉽지도 않고, 대중적 설득력도 떨어진다. 그 양적 성과는 생산량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발언권의 힘이고 헤게모니이고 세력을 말한다. 자본의 발언권과 주도권은 경제영역에만 관철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여타 부분에서도 관철되고 그러다 보니 우리 의식까지도 장악하고 있다. 양적 발전이 질적 전환을 이뤄 전일적 지배를 이루게 된 것이다. 자본의 엄청난 성장은 양적 측면에서 보면 자원과 에너지의 소비 증가이고, 관계는 최소 단위로 파편화되고, 환경오염과 사회적 모순 또한 심화되어 간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농촌해체와 관계의 분절로 소비시장이 성장한다. 이 소비시장은 바로 도시의 성장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농촌의 해체이고, 그나마 남은 농촌도 자급능력을 상실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촌도 살아남기 위해 자본과 시장질서에 편입 및 포섭되어서 지역의 식량자급 위주의 농사가 아니라 시장을 향한 상품작물 위주의 단작 농업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농촌도 소비시장이 되었다. 그러니 도시는 말할 것도 없다. 도시는 자급능력이 없는 기생적인 공간으로 에너지, 자원, 식량, 물 등 시민의 삶과 도시체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외부로부터 공급받아야만 한다. 심지어 생명활동과 생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폐기물의 처리마저도 외부에 의존한다. 도시의 ...

2019.10.10.

[충청리뷰 언론기고] 우리는 어딜 향해 질주하는가?(9월 1주차)

  우리는 어딜 향해 질주하는가? - 도로와 길 -   9월의 주제는 대중교통이다. 대중교통은 수단적 측면이 크다. 교통수단은 도로의 ‘의지’를 구현하고자 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먼저 도로에 대해 살펴보고, 다음으로 수단들의 현황과 실태, 그리고 그 이유인 도시화, 산업화, 삶, 성장, 속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대안이라 할 수 있는 지역과 그 지역적 교통수단과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도로’ 이전에 ‘길’이 있었다. 길은 의지이다. 관계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자 결과다. 길은 걷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걸으면 그것이 길이 된다.’는 말은 기득권과 고정관념에 맞서는 주체적이고 변혁적 관점도 들어 있다.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태초에는 길이 없었지만, 한 사람이 가고 또 가면서 생겼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길은 어느 순간부터 주어진 것으로 되어 체제 내화된다. 그에 맞춰 고정관념도 생기면서 사회 구조는 변동 불가능한 것으로 된다. 고정된 길이 삶을 억압하고 기존의 틀을 강요하기 시작하면, 새로운 길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일어난다. 길은 사회적 상황에 대응하는 역동적 변화 과정이다. 어째든 길은 한 번 걸어서는 안 된다. 혼자서 여러 번 걷거나 여러 사람이 걸으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 반면 도로는 길과 다르다. 권력과 자본의 표상이자, 저들 의지의 표현이다. 도로는 자본과 상품을 실어 나르는 혈관이다. 그래서 속도가 중요하다. 빨리 빨리 피가 돌아야 건강하다고 판단하듯이, 도로는 생산지와 소비지를 곧장 연결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있다. 도로는 그래서 속도를 추구한다. 그래서 도로는 길처럼 사람 사는 마을과 마을을 잇기 위해 에둘러 가지 않는다. 생산된 잉여가치 실현을 위해 생산지에서 곧장 소비지인 도시로 곧장 내달린다. 강을 따라 산자락을 돌아 마을마다 들리는 길은 비용일 뿐이다. 그러니 발전과 성장을 추구하는 순간 효율과 속도가 내면화되고, 그렇게 도로는 우리 의식에서 길을 배제하고 의식을 장악했다. 그래서 논밭...

2019.10.10.

[충청리뷰 언론기고] 기본권과 성장, 일회용품(8월 4주차)

  기본권과 성장, 일회용품   왜 우리는 일회용품을 사용하는가? 보통은 의식하지 못한 채 곁에 있으니 사용한다. 특별히 내가 환경과 삶, 생명체 간의 연관된 문제를 의식하고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일회용품이 끊임없이 삶 속으로 들어온다. 식당에 가면 물수건이 거의 자동으로 나온다. 대개는 일회용 물티슈다. 식당 주인 입장에서 보자면 일회용품은 일상이 되어버려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는 자구책이란 측면이 있고, 비용 절감을 위한 경제적 측면도 있다. 여기에 환경 측면은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인다. 즉 손님의 요구는 사회적이고 문화적 차원이고, 사장님의 일회용품을 제공하는 노력은 치열하게 경쟁하는 경제구조 속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거의 생존권 차원이어서, ‘니 문제도 아니고, 내 문제도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 즉 누구의 책임도 아니지만 현실에 심각하게 존재하는 보편적 문제인 일회용품 사용은 한 개인의 노력을 쉽게 무력화 한다. 이때 제도적, 법적으로 일회용 사용 금지라는 새로운 경쟁조건을 만든다면 같은 생존경쟁을 해도 최소한의 사회적·환경적 기본권 위에서 더욱 나은 격조 있는 경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시민들의 정치·사회의식이 환경문제 해결에서 중요한 열쇠가 된다. 대의민주주의 정치에서는.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선택하는 경우인데, 그 선택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이뤄지는 측면이 존재한다. 풍요롭고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개인의 선택이 존중받고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자본이 사회 발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상태에서는 선택은 본질적으로 ‘강요된 것이며 획일적인’ 일수밖에 없다. 그리고 생산력과 사회의 발전은 풍요와 더불어 삶의 속도와 경쟁의 심화를 낳아, 어쩔 수 없이 외식하게 되고, 새벽 배송을 클릭하게 만든다. 새벽 배송, 외식은 삶을 우회하는 것으로 경제적으론 성장으로 귀결되지만, 사회적, 환경적으로는 비용 증가와 삶의 질 저하로 이어진다. 빠른 삶의 속도와 경쟁의 압박으로 인해 너무 피곤해 새벽 배송을 시킬 수밖에 없...

2019.09.02.

[충청리뷰 언론기고] 플라스틱 사회(8월 3주차)

  플라스틱 사회 - 편리함의 역습 -   CNN 방송을 타고 전 세계로 알려진 의성의 ‘쓰레기 산’, 중국의 쓰레기 수입 중단으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재활용품 수거업체가 수거를 중단하여 빚어진 쓰레기 대란 문제, 필리핀으로 수출되었던 플라스틱 쓰레기가 다시 돌아온 일. 모두 최근에 일어난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이다. 이들 사태는 그동안 분리배출을 열심히 했기에 재활용이 잘 되고 있고, 분리배출만 잘하면 지금처럼 사용하고 버리는 소비중심의 사회도 괜찮다는 생각이 얼마나 근거 없는 막연한 믿음에 불과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그리고 이 사태를 계기로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가 우리 사회만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 사회, 도시중심의 산업사회, 소비사회인 전 세계의 문제라는 사실을 일반인도 어느 정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성 같은 쓰레기 산은 없지만, 유럽과 미국, 일본도 일상에서 쓰고 버려진 폐플라스틱을 우리처럼 중국을 비롯한 후발개도국들에게 수출하여 해결(?)하여왔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폐플라스틱을 수출하기도 하지만, 수출보다 많은 양을 수입한다는 것이다.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그 세세한 내용까지 같은 것은 아니란 반증이다. 어쨌든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는 아직까진 어느 나라도 해결하지 못하고 나라 밖으로 밀어내 ‘해결’이 아닌 ‘처리’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작은’ 차이에서 우리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플라스틱은 나온 지 100여 년 정도이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배출된 물질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플라스틱 문제도 위험한데, 그동안 너무 작아서 몰랐던 ‘미세 플라스틱’의 위험까지 드러났다. 먹이사슬과 지구 기후 순환을 따라 이동하여 새알, 북극의 빙하, 식탁 위의 생선과 소금에서까지 검출된다. 따라서 먹이사슬의 정점에 위치한 인간은 그 위험을 도저히 피할 수 없다. 플라스틱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는 물질이 되었다. 이 문제는 이윤을 그 어떤 가치보다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자본주의 ...

2019.09.02.

[충청리뷰 언론기고] 일회용품(8월 2주차)

일회용품   8월 주제는 ‘일회용품’ 안 쓰기이다. 지난주에 ‘소비사회’에 속에서 왜 물건을 소비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다뤘다. 일회용품은 그 소비사회의 첨단에 서 있고, 상품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다. 이윤추구를 자신의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리성은 경제적 합리성, 효율, 생산성, 성장의 가치로 표현된다. 이것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물건, 상품이 일회용품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체제 안에서’ 일회용품 사용을 거부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가장 앞부분에서 맞서는 것으로 쉽지 않은 싸움이고, 자기 모순적이기까지 하다. 물건을 만드는 목적은 쓰임이다. 물론 그 쓰임이 다하면 물건은 버려진다. 그래서 살림에서는 그 쓰임이 되도록 오래가도록 물건을 만든다. 자주 만드는 것은 에너지와 시간, 자원 낭비로 살림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살림은 반성장적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물건은 상품으로 달리 불리고, 상품은 물건과 다른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상품은 ‘돈’과 교환을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즉 팔리기 위해서 만들어진다. 이런 점에서 자본은 살림과 달리 근원적으로 성장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이 교환과정을 통해 자본은 이윤을 획득하고, 사는 사람은 살림의 필요에 충당하고자 상품 아닌 물건을 산 것이다. 여기서 생산자와 구매자의 의도가 ‘잠시’ 충돌하지만, 합리성, 효율의 가치가 새로운 필요를 창출하여 이 과정이 지속되도록 한다. 소비사회의 ‘소비’는 필요를 충족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욕구를 만들어내 소비의 동력으로 작동하게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욕구는 충족되지 않아 소비를 계속하게 만들어 자본주의 체제 유지의 동력을 제공한다. 극단적인 소비형태인 ‘일회용품’은 초고도의 효율성을 추구하고 여기에서 둘 사이의 합리성이 만난다. 이 둘 간의 합의가 빚어낸 숫자들을 한번 보자. 우리나라 1일 플라스틱 폐기물 배출량은 2016년 5445톤이다. 연간 1인당 플라스틱 사용량(2016)은 135.41kg(환경부 통계, 98.2kg...

2019.09.02.

[충청리뷰 언론기고] 소비사회, 폐기물사회(8월 1주차)

소비사회, 폐기물 사회   요즘 밥 한 끼, 6천 원이면 감사하고 보통 7, 8천 원을 내야 먹을 수 있다. 식당에 들러 주문하고 먹고 나서 숟가락 놓고 계산하고 돌아서면 끝이다. 거기에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라도 주고받으면 좋겠지만 서로 바빠서. 그래도 인사가 오가면 그것은 자기 삶의 품위를 스스로 더하는 것이다. 어디 밥(재화)뿐인가? 대표적인 문화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연극관람도 밥 사 먹는 것과 다르지 않다. 좋아하는 메뉴 고르듯 취향에 맞는 연극 찾아 극장 가서 표를 사서 관람하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집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진 돈과 어디서 살 것인지 지역을 정해서 소위 매물을 둘러보고 사면 된다. 액수가 커서 권리(소유권)에 대한 보장이 추가로 있지만, 그 과정(용역) 또한 돈 주고 사면 그만이다. 이것은 일상의 흔한 모습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 거래들은 돈을 건네주고 그에 상응하는 ‘것’(상품 또는 용역)을 받았기에 등가교환으로 ‘평등’하고 ‘민주’적인 거래다. 이것이 전부라면 이 거래는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러나 등가교환의 세계인 지금의 현실을 보면 그렇지 못하다. 그 이유는 이 거래가 보여주고 있는 등가교환은 겉모습에 불과하고, 실체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민주적인 등가교환이 가리고 있는 ‘소비사회’이다. 이 소비사회의 소비는 이전부터 존재한 소비와 다르다. 이전 사회가 보여준 소비는 사회 전체를 하나의 시장으로 표준화할 필요성이 없었으며, 오히려 소비를 통해 차이를 두드러지게 했고, 노동과 생산과정과 통합되어 있었다. 반면 대량생산체제는 ‘차이’를 체계적으로 제거하고, 엄청난 생산력을 통해 사회 전체(삶의 양식, 의식)를 ‘표준화’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소비사회의 물적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소비사회의 소비는 노동, 생산과정과 분리되어 있어 생산의 생생한 과정을 우리 눈앞에서 없애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쇼핑센터에 가면 그 많은 상품을 볼 수 있지만, 누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가는 알...

2019.09.02.

[충청리뷰 언론기고] 피서라 할 수도 없는(7월 4주차)

피서라 할 수도 없는 휴가 한반도의 여름은 만만치 않다. 그 이유는 고온보다도 높은 습도 때문이다. 물이 공기보다 열용량이 커서 더 덥다. 같은 온도라도 습식 사우나가 건식 사우나보다 견디기 힘든 것과 같은 이유다. 한반도의 여름을 지배하는 기단은 바다에서 온 북태평양고기압으로, 이 기단이 머금고 있는 습기 때문에 한반도의 여름은 기본적으로 꿉꿉하고 후텁지근해 쾌적한 생활을 하기에는 힘들다. 대륙의 건조한 기단이 내려오는 가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후텁지근한 여름을 나는 것이 한반도를 떠나지 않는 한 이 땅에 사는 우리의 숙명이기에, 숨을 턱턱 막는 여름을 나는 나름의 방법을 찾아냈다. 먼저 시원한 여름 음식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높은 온도와 습도로 음식이 쉬이 상할 수 있음을 항상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은 여름에 얼음 구하기가 너무 쉽지만, 냉장고가 나오기 전에는 쉽게 구할 수 없었고 얼음 공장이 없을 때는 석빙고 정도 가지고 있어야 먹을 수 있었다. 따라서 얼음이 들어간 음식은 전통적인 여름 음식이라 할 수 없다. 지금은 여름 음식이 되어버린 냉면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름 요리하면 콩국수, 깨로 갈아 만든 임자수탕, 오이와 호박 여름 채소를 이용한 여름 만두 편수 정도가 떠오르고, 땀을 많이 흘리니 체력 보충으로 왕이 먹었다는 제호탕, 서민들의 개장국, 천렵 매운탕, 닭백숙 혹은 삼계탕, 그리고 시원한 오이 냉국, 우무 냉국, 보리수단 등이 생각난다. 그리고 시원하게 여름을 보내는 방법으로 대밭에서 쉬기. 대가 자라는 남쪽에 해당하는 얘기지만, 쭉쭉 뻗은 푸른 대나무는 시각적으로도 시원하지만 재질 상으로도 시원하고, 음이온이 더 많이 나와 맑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는 댓잎 소리는 머릿속까지 맑게 해준다. 하지만 뱀을 조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등골까지 오싹하다. 대밭에 자리를 깔고 누워 쭉쭉 뻗은 푸른 대나무 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을 봤다면 이미 더위는 거기에 없을지도 모른다. 대나무...

2019.07.31.

[충청리뷰 언론기고]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7월 3주차)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의 “지구를 살리는 시민실천 캠페인” 7월 주제가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는 나만의 방법”으로, 그 첫 번째가 ‘여름은 더우므로 시원하게 나는 것은 무리다. 시원하게 나려면 에너지를 써야 하고 그로 인해 결국 더 더워진다. 고로 자연을 잘 이용하자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자본주의의 성장과 도시화, 효율, 이윤 추구가 도시를 더 덥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그 궁극적 결정판으로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이다. 여름 좀 시원하게 나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가벼운 주제를 이렇게 무겁게 끌고 간 것은 오늘 하루만 살고 말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온난화라는 인식틀은 너무 커서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망막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구가 더워져서 인류가 멸망 위기에 처한다면 ‘경제’나 ‘성장’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지구이다. 그래서 인류의 관점에서 이 더위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이다.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는 말 그대로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1975년 8월 8일, 과학전문지 『사이언스(Science)』지에 〈우리는 뚜렷한 지구온난화에 직면해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지구과학자 W. S. 브뢰커가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비로소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객관적 실제가 존재해도 그것을 지칭하는 말이 없으면 인식하지 못하며, 대응할 수도 없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인식으로부터 13년이 지나고서야 지구가 더워지는 것을 인류 모두의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988년에 유엔환경계획(UNEP)과 세계기상기구(WMO)에 의해 IPCC(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라는 정부간협의체가 만들어져 국제적 대응책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

2019.07.31.

[충청리뷰 언론기고] 도시가 더운 이유(7월 2주차)

도시가 더운 이유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의 “지구를 살리자” 7월 캠페인 두 번째 주제는 “도시가 더운 이유”이다. 지난 주에는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난다’는 것의 ‘이면’에 대해 생각해봤다. 앞에서는 시원하지만, 그 뒤에서는 시원함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여러 사람에게 본의 아니게 피해를 주고, 잘못된 제도로 인해 그나마 누릴 수 있는 혜택마저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사회구조적 측면에 대해 말했다. 이번에는 좀 더 주제를 구체화하여 도시가 더운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름 한 낮에 도심은 걷기가 쉽지 않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지나가는 차량에서 내뿜는 매연과 열기, 건물 벽에서 반사된 열기, 냉방기 실외기에서 나오는 열기까지 더해져 숨 쉬기가 쉽지 않다. 거기다가 머리 위에서는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 쬐고 있다. 이렇게 걷다가 가로수 그늘 밑이라도 지나가면 한결 수월하다. 나무 그늘의 ‘위력’을 이때만큼 절감한 적이 있을까 싶다. 가로수 위력도 이 정도라면 도심 내에 큰 공원이 있다면, 어느 정도일까 가늠이 쉽지 않다. 행복한 상상도 잠깐, 신호등을 기다리는 데는 그늘조차 없다. 그래서 그 좁은 전봇대 그늘이라도 찾는데, 자리가 없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지자체에서 그늘막을 설치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뭔지 모르게 아쉬우면서도 나름 고마운 처사에 감사한 맘으로 햇볕은 피해보지만 열기는 어떻게 피할 수가 없다. 해가 진 후에도 도시는 온도가 거의 내려가지 않는다. 더 이상 그늘을 찾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게 시원해지진 않았다. 낮동안 달궈졌던 아스팔트가 열기를 여전히 내뿜고 있고, 건물 외벽에서도 뜨거움이 훅 끼쳐오고, 냉방기 실외기는 더 많이 돌아간다. 해가 지자 도시는 조명으로 어둠을 밝히고 또 돌아간다. 가게들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냉방을 아낄 수 없을 것이다. 전기 요금도 아끼고, 환경도 생각해 실내 적정 온도를 유지했다간 하루 장사, 아니 영업을 망칠 수도 있을 것이다. 건물들 사이에서 뜨거운 음식냄새까...

2019.07.31.

[충청리뷰 언론기고] 여름을 시원하게 나려면(7월 1주차)

여름 나기가 쉽지 않다. 더위도 문제고, 끈적한 습기도 문제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는 것이 우리나라 여름을 지배하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특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북태평양 고기압이 여름의 한반도를 장악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에 사는 우리는 후텁지근한 여름날씨에 익숙하고 여기에 맞는 생활 및 주거양식을 정착시켜 왔다. 그 속에서 여름을 50번 넘게 맞았는데도 숨이 턱턱 막히는 도심의 열기와 무더위는 잘 익숙해지지 않고 갈수록 힘들다. 이 힘든 여름을 어떻게 넘길 것인가? 한 여름 도심의 길에 나가면 열기가 확 끼쳐 올라와 숨이 턱하고 막힌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아스팔트 열기, 건물 벽에 내뿜는 열기, 게다가 냉방기 실외기 곁을 지나치기라도 하면 화까지 올라온다. 자기들 시원하자고 열기를 행인들에게 떠넘기다니. 그래도 요즘은 실외기 뜨거운 바람이 행인에게 직접가지 않도록 방향전환판을 붙여 뜨거운 바람이 위로 가서 조금 낫다. 그런데 이번에는 좁은 길에 주차된 차가 통행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열까지 품어낸다. 햇볕에 달궈진 뜨거운 철판으로도 부족해 차량 냉방기 열기까지. 이렇게 되면 도심을 걷는 것은 수행이거나 고행이다. 건물 안과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곱게 봐주기 힘들다. 그러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상황이 역전되었다. 너무 시원하고 쾌적하다. 어느새 툴툴거림은 사라지고 냉방기 찬바람 혜택을 만끽하는 수혜자가 되었다. 나는 이제 거리에서 열기의 삼중 사중 테러의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었다. 아! 한반도의 여름이 우리를 여러 가지로 힘들게 한다. 뜨거운 여름철 한반도에서 사는 우리는 단지 볼 일 때문에 거리로 나갔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뿐인데, 서있는 위치에 따라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수시로 전환된다. 그렇지 않아도 더워서 힘든데, 윤리의 문제까지 제기하다니. 건물에 들어서서 밖을 보니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과 태양이 시원해 보인다. 내가 시원하니 내 눈에 보이는 풍경도 그...

2019.07.23.

[충청리뷰 언론기고] 안전한 에너지, 깨끗한 전기! 누구 책임인가?(6월 4주차)

  원자력 발전소는 ‘경제성장과 산업발전’을 명목으로 시작되었는 데, 국제원자력기구(IAEA) 자료에 의하면 2018년 현재 전 세계에 가동중인 원전은 449기, 건설중인 56기 합해서 500개 넘는다. 총 시설 용량은 약 45만 MW로 전세계 원전발전비중은 10%정도이며, 감소추세에 있다. 한국은 2018년 현재 원전이 OECD 평균보다 10%정도 높은 반면 재생에너지는 10%정도 낮다. 고리, 울진, 월성, 영광 등 국내 모든 원전단지는 원자로밀집단지 세계 10위 안에 들어가 있으며,원전 반경 30km 이내 인구수도 고리 341만명(일본 후쿠시마 17만명 22배) 등으로 너무 위험하다. 일본 후쿠시마가 천재지변으로 인한 해일로 폭발했다며 불가항력이라고 한다. 이는 아무리 정부가 안전하게 설계하고 시공을 한다고 해도 천재지변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2011년 후쿠시마 원전폭발이 보여준 것이다. 불가항력의 천재지변을 막을 수 없는 한 원전은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처리방법도 없이 임시창고에 그냥 쌓아 놓고 있는 고준위핵폐기물이 1만6500톤이나 있는 이는 어떻게 할 것인가? 10만 년 이상 관리해야 하는 이 폐기물만 관리하는 것도 위험하고, 비용이 엄청나다. 그래서 원전은 저렴하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다. 에너지는 경제성장에 필수이다. 경제성장을 위해 도입된 원전, 그리고 저렴한 비용으로 그간 산업계는 혜택을 누리고 그것을 밑바탕으로 하여 그동안 급속한 양적 성장을 달성하였다. 그 결과 경제성장과 전기소비 증가률은 동반 상승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외연적 성장은 성장만큼 에너지도 소비하였다. 그러나 IT기술을 포함한 기술이 발전하면서 에너지 효율이 높아지고, 에너지 저소비 산업으로 산업구조를 전환하고, 에너지원의 다양화를 추진하여 전기비중을 낮추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과 제도를 정비하면 경제성장률과 전기소비 증가량의 동반상승은 더 이상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경제성장과 에너지소비 사이에 디커플링 현상이 나타났다...

2019.07.23.

[충청리뷰 언론기고] 에너지 시민 이태양씨 하루(6월 3주차)

에너지 시민 이태양씨 하루 전기가 처음 들어오던 날 기억, 197*년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어느 날 고향집 밤을 잊을 수 없다. 해가 짧은 겨울에는 해지기 전에 밥을 서둘러 먹고, 호롱불 아래 엎드려 책을 보거나 마실 온 할머니들 이야기를 옆에서 듣다 잠이 들었는데, 전기가 이 칠흑 같은 밤을 밝혀주고 나서부터 많은 것이 서서히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전기하면 이태양씨에게 생각나는 것은 변소에 켜진 5촉(5W로 촉은 촉광이거나 촛불을 의미, 과학적으로 환산된 단위가 아니라 우리식 표현처럼 다정하다. 전기가 그렇게 다정한 것이 아닌데, 그러나 지금은 안타깝게도 쓰이지 않는다)짜리 빨간 전구이다. 무서워 어쩔 수 없이 켜긴 했지만 밝지도 않고, 귀신을 쫓는다는 빨간색 전구 빛이 더 무서웠다. 곳곳마다 좀 밝아졌지만, 호롱불, 남포불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고, 불 끄라는 잔소리는 더 많이 들어야 했다. 가을 수확이 끝나야 비로소 돈을 마련할 수 있었던 시절에 ‘다달이’ 요금을 내라 하니 전기는 그처럼 무서웠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시골의 밤문화, 놀이문화에도 변화가 왔다. 마실 가던 아주머니 할머니도, 정자나무 아래 모여서 놀던 아이들도 이제 밤에는 집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다. 대신 TV가 있던 집으로 몰려다니면서 주말에는 타잔이나 레슬링을, 주중에는 일일 연속극을 봤다. 그러면서 아주머니들과 아이들의 대화 주제가 자신들의 삶과 무관한 어제 봤던 TV였다. 우리 삶과 무관했던 TV가 우리 삶이 되었다. 이렇게 삶에서 TV에 의해 자신들이 쫓겨나 스스로 소외되었고, 그렇게 문화의 주체에서 문화 소비자로 전락했다. 이태양씨는 전기를 타고 온 TV를 통해 다른 세상과 마주했고, 그 세상을 동경하게 되었지만, 전기는 무엇으로 발전되고, 누가 어떤 정책결정과정을 통해 전기를 공급하는지, 왜 발전소와 전기를 쓰는 곳이 멀리 떨어져 초고압으로 송전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알 수도 없었다. 도시에서 본격적인 소비자 보름달이 시리게 비췄던 고향의 그 겨...

2019.07.22.

[충청리뷰 언론기고] 원전과 사회, 민주주의(6월 2주차)

원자력발전소와 한국 사회, 그리고 민주주의 에너지와 자원의 획득은 사회 성격과 기술 수준에 따라 획득 양식, 소비 양태가 다릅니다. 그런데 사회발전의 핵심을 기술이라고 여기고, 기술을 도입습〮득하려고 사회적 노력을 다합니다. 이런 인식의 바탕에는 ‘기술은 그 사회가 발전해온 역사와 무관’하며, ‘가치중립적인 도구’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도 결국 그 사회 안에서 사회구성원인 시민과 그들의 의사결정구조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라 이름은 같은 ‘과학기술’로 불리지만, 그 내용과 작동방식은 그 사회 구조, 성격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한국사회에 원전은 군사독재정권이 경제성장을 위한 전력공급을 안정시키기 위해 도입을 결정하였고, 이후 안보를 위해 핵개발 논의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원전은 도입결정은 국회나 사회적 논의를 통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정권과 소수의 전문가 집단에 의해 독점되었고 일방적으로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양상이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것도 아닙니다. 원자폭탄의 개발과 이후 ‘핵의 평화적 이용’으로 탄생한 원전 전환 과정에서도 기술의 속성과 사회의 관계 양상이 잘 드러납니다. 전쟁의 종식,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전체나 국가를 위한 결정이라는 국가주의의 폭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출발부터 보였던 국가주의적 폭력성과 폐쇄성은 이후에도 지속됩니다. 원전 기술체계는 너무 거대해서 한 사회의 많은 부분들이 동원되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속성은 이미 기술 안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술의 특성과 사회구조성격과 일방적이고 않고 이렇게 서로 얽혀 있습니다. 그런 원전의 기술적 특성에다 도입 당시 우리사회의 비민주적인 조건이 결합하여1987년 이전 원전에 대한 것은 관련 전문가와 국가에게만 공개되었고, 시민들은 접근이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러니 시민들은 원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 ‘핵발전국대열’에 올라 ‘과학한국’을 자랑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원전에 대한 좋은 ‘이미지’만 갖고 있던 시...

2019.07.22.

[충청리뷰 언론기고] 너무 편리한 전기(6월 1주차)

청주충북환경연합의 초록실천위원회에서 매월 다른 주제를 가지고 '2019 지구를 살리는 시민실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캠페인과 관련해서 환경 보호 인식을 확산하고자 충청리뷰와 연계하여 언론기고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매주 한 개의 기고글이 게시되고, 매월 하나의 주제로 진행됩니다. 1주차는 문제 제기 / 2주차는 상황 및 실태 / 3주차는 문제 해결 방안 / 4주차는 정리 및 캠페이너 활동 내용 작성될 예정입니다. 6월 주제는 '에너지 낭비 줄이기'입니다. 그럼 올해 끝까지 함께 환경 전반에 걸쳐 지식과 지혜의 영역을 넓혀보도록 하겠습니다~ 전기, 너무 편리한 에너지 6월의 주제는 “우리 그냥 끌까요?”라는 주제로 전기입니다. 세번에 나눠 “너무 편리한 에너지, 전기”, 그 편리함, “에너지와 전기, 전기 생산과 소비에 대한 것으로 민주주의와 책임”, “보다 안전하고 지속가능하기 위한 에너지 소비”입니다. 그리고 이 기획은 어떤 주장과 논리를 관철시키기 보다는 논의를 위해 마련된 장입니다. 전기는 인류가 발견한 에너지 형태 가운데 소비 측면에서 가장 편리하고 안전한 겁니다. 석탄이나 나무를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가죠. 전기가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고밀도 집적의 도시 발전이 가능 해졌습니다. 전기가 없던 고대나 중세에도 도시는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100층이 넘는 건물이 즐비한 도심이 전기가 없었다면 어떻게 가능할까요? 조명, 난방, 화장실, 100층을 오르내리는 것을 생각만 해도 아찔해집니다. 왜 전기와 고층빌딩이 결합하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만, 왜 굳이 고층건물을 지어야 했는지? 고층건물과 전기의 결합은 소비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최상의 결합이란 사실은 분명합니다. 마천루가 소비사회의 중심이 되어 상품 소비 문화의 전범(典範)을 만들고, 이 전범은 도시의 주변부로 의식의 변방으로, 국경을 넘어 주변부 국가로 전파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마천루와 전기’는 자본주의와 환상의 짝이 되었는지...

2019.07.22.

무심천의 드렁허리(8월)

<드렁허리>     여름 장마는 길고 무서웠습니다. 그날 아침에 쏟아지는 비에 두려움이 들어 어찌할지 몰라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수해가 지나가고 다시 사람들의 손으로 삶이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자연의 경고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남기곤 합니다. 지금도 삶의 거처를 다지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에게 용기의 기도로 시작합니다. 산에서 시작한 물에는 길이 있습니다. 보통 이런 곳을 수로로 만드는데 기존보다 신속하게 흐르게 하기 위해 하천을 일자형으로 정비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수로가 모이는 하천은 갑자기 내려오는 물을 감당하기에 힘이 듭니다. 물이 유입되는 양과 속도를 조절해야 하지만 일자형인 수로는 더욱 빨리 물을 하천으로 보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적은 수량만 있는 큰 하천도 물의 양을 감당할 수 없어 둑이 넘쳐버리고 맙니다. 둑이 무너진다는 것은 삶이 무너지는 것과 같습니다. 무심천에 사는 물고기 중에서 이 둑과 연관된 물고기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드렁허리입니다. 드렁허리는 ‘둑을 허물다.’에 어원으로 전해집니다. 두렁헐이에서 두렁허리로 다시 드렁허리로 변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드렁허리 방언으로 드랭이, 땅빼기, 땅패기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드렁허리는 미꾸리와 닮았고 또한 장어와도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어릴 적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드렁허리가 나와 뱀인 줄 알고 놀라 물에 자빠졌던 추억이 있습니다. 뱀과도 닮았는데 이런 몸의 형태에 맞게 물이 있는 논둑의 땅속에 구멍을 내어 살아갑니다. 하지만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둑이 무너져 내리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해 농민들이 둑을 무너뜨린다고 잡아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드렁허리는 생김새만큼 생태적으로 특이한 물고기입니다. 우리나라 남부지역에 잘 서식하는데 우리나라 외에도 동남아 일대의 남방계 지역에 서식을 합니다. 또한 60cm 이상 자라며 야행성으로 밤에 진흙에서 나와 곤충이나 작을 물고기를 먹고 살아갑니다. 드렁허리는 드렁허리과에 속하는 물고기로 ...

2018.04.18.

무심천의 민물검정망둑(7월)

<민물검정망둑 빨판>       가뭄으로 맘고생을 하다가 이젠 비에 맘고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도 없어서 힘든 것보다 넘쳐서 힘든 것이 마음이 편한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무심천도 몇 번의 하상도로의 범람이 있었습니다. 장마 때 하천에 흐르는 많은 물은 생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곤 합니다. 첫 번째로 무심천에 겨울과 봄에 쌓였던 많은 퇴적물들이 하류로 모두 이동하여 수질이 좋아지게 됩니다. 쉽게 이해하면 하천을 깨끗하게 물청소를 한 것과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모래와 자갈의 이동이 생기게 됩니다. 모래톱이 자연적으로 형성되기도 하고 모래와 펄이 쓸려간 곳은 자갈 여울로 바뀌게 됩니다. 하천의 자연적인 퇴적층 변화는 다양한 수서동물의 건강한 서식지로 탈바꿈됩니다. 세 번째로 하천 주변의 식생의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유실된 지형도 범람해서 만들어진 습지에도 또 새로 퇴적된 모래톱에도 다양한 식물들이 자리 잡고 살아가게 됩니다. 거침없이 흘러가는 무심천을 바라보면서 저 빠른 물속에서 물고기를 어떻게 보낼지 궁금해집니다. 물고기들은 각각의 방법으로 이 어려운 환경을 피해 살아갑니다. 대부분이 유속이 느린 곳이나 수초 사이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도 맘을 놓을 순 없는 일입니다. 피라미 치어 같은 경우는 몇십 km 떠내려가 그 하천에서 다시 자리를 잡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체 변화해 진화적인 방법으로 물살을 이겨내는 물고기도 있습니다. 바로 망둑어 종류입니다. 우리와 친숙한 망둑어는 보통 망둥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속담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 ‘바보도 낚는 망둑어’로 자주 사용됩니다. 하지만 망둑어를 그리 좋게 평가하진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망둑어의 어원은 망동어(望瞳魚)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냥 불리던 이름을 한자로 옮겨 붙였을 수도 있습니다.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에 망둑어가 등장합니다. 망둑어는 무조어(無祖魚)로 설명되는데 ‘제 살을 뜯어먹어 조상도 못 알아본다.’라고 전해집...

2018.04.18.